경부고속도로·초고속인터넷망 그리고 AI 인프라···한국, 도박과 승부수의 역사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이 어떻게 기술 선도국이 됐을까요. 답을 좁히면, 남들이 말리던 시점에 국가 인프라에 크게 베팅한 선택들이 보입니다. 1968년 경부고속도로, 2000년 초고속인터넷망, 그리고 2026년의 AI 인프라입니다. 매번 ‘무모한 도박’이라는 말이 따라붙던 선택이었습니다.

왜 매번 ‘도박’으로 보였나

세 번 모두 돈이 없었습니다. 1968년 경부고속도로 공사비 429억 원은 1967년 국가 예산의 약 24%였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42달러이던 시절입니다. 세계은행(IBRD)은 차관을 거절했습니다. 자동차도 몇 대 없는 나라에 고속도로는 이르다는 이유였습니다.

2000년은 더 나빴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로 대기업이 줄도산하던 때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광케이블에 재원을 쏟는 일이었으니까요. 2026년 AI 경쟁의 상대도 만만치 않습니다. 수백조 원을 굴리는 빅테크와 미국·중국이 앞서 달리고 있습니다.

도박이 아니라 이미 가진 강점 위의 베팅

세 선택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없는 것을 꿈꾼 게 아니라, 이미 쥔 강점을 다음 단계로 이은 점입니다.

1968년 한국은 원자재를 들여와 가공해 수출하는 제조업으로 체질을 바꾸던 중이었습니다. 서울에서 부산 항구까지 물류를 한 줄로 잇는 길이 그 체질에 맞았습니다. 개통 뒤 물류비가 내려갔고, 1970년대 중화학공업의 혈관이 됐습니다.

2000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부는 2000년 말 전국 144개 통화권을 잇는 광케이블 기간망을 완성했고, 당초 2010년이던 전체 구축 목표를 2005년으로 앞당겼습니다. 이 선제 투자가 ADSL 요금 경쟁에 불을 붙였습니다. 2026년 AI 베팅의 바탕도 분명합니다. 한국은 HBM 같은 메모리 반도체에서 세계 최상위권이고, 자체 대형언어모델(LLM)을 독자 개발한 몇 안 되는 나라입니다.

세 번의 투자는 모두 자원이 부족한 시점에, 이미 보유한 산업 강점 위에 다음 단계 인프라를 얹는 방식이었습니다.

구분1968 경부고속도로2000 초고속인터넷망2026 AI·반도체
인프라 성격물리적 인프라디지털 인프라지능형 인프라
핵심 사업428km 고속도로 (429억 원)144개 통화권 광케이블 기간망AI 예산 9.9조 원 + 민간 약 5,000조 원 투자 계획
주도 주체정부정부 주도·민간 경쟁정부 정책 틀·민간 주도
기반이 된 강점수출 제조업 체질전자·통신 산업메모리(HBM)·독자 LLM

2026년, 돈의 규모가 다시 쓰여

규모는 과거와 비교가 안 됩니다. 2026년 6월 29일 청와대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반도체 클러스터와 AI 데이터센터 등에 각각 2,655조 원, 2,100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GS와 네이버를 더하면 약 5,000조 원에 육박합니다. 정부 2026년 AI 예산 9.9조 원과는 자릿수가 다릅니다.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

눈에 띄는 대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균형발전입니다. 호남·충청·영남 등 비수도권 몫만 약 1,600조 원이고,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에 삼성과 SK가 각각 400조 원을 넣습니다. 다른 하나는 데이터센터입니다. SK는 AI 데이터센터에만 1,000조 원, 15GW 규모를 짓겠다고 했습니다.

진짜 시험대는 전력과 인재

돈이 모였으니 끝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2026년 4월 스탠퍼드 HAI의 ‘AI 인덱스 2026’을 보면, 한국은 인구 10만 명당 AI 특허 14.31건으로 특허 밀도 세계 1위입니다. 그런데 같은 보고서는 한국의 약점으로 핵심 인재 유출을 짚었습니다. 영국 토터스미디어 글로벌 AI 인덱스에서도 인재는 13위, 산업 생태계는 17위에 그쳤습니다.

전력은 더 까다롭습니다. SK 한 곳이 예고한 15GW부터가 만만치 않습니다. 산업통상부는 2029년까지 국내 신규 데이터센터 소요 전력을 약 49GW로 봤습니다. GPU와 건물을 세워도 전기를 대지 못하면 그대로 멈춰 섭니다.

경부고속도로와 광케이블은 길과 선을 깔면 그 위로 산업이 따라왔습니다. 이번 베팅은 다릅니다. 돈은 역사상 가장 크게 모였습니다. 남은 질문은 방향입니다. 인재가 떠나지 않을 환경과 전력, 그리고 균형발전 약속을 같은 속도로 깔 수 있을까요. 30년 뒤 이 5,000조 원을 어떻게 기록하게 될지는, 거기에 달려 있습니다.